[아름다운사회]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 > 컬럼

본문 바로가기

사이트 내 전체검색

뒤로가기 컬럼

기타 [아름다운사회] 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

본문

[권영상 작가]

내 고충을 들은 딸아이가 컴퓨터를 구입해 놓았단다. 새로 컴퓨터를 사면 여러 파일을 옮기는 작업이 번거롭다. 딸아이가 제 직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바꾸긴 바꾸어야 했다.

지금 쓰는 컴퓨터는 산 지 12년이나 됐다. 적지 않은 시간이다. 그 사이 나는 직장에서 벗어났고, 안성에 텃밭을 구해 텃밭 농사를 짓고 있다. 그러면서 퇴직 후의 일상에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.

내 컴퓨터 작업이야 뻔하다. 주로 ‘한글’ 작업이다. 그 외 방문자 수가 12만 명쯤 되는 블로그가 있고, 거기에 필요한 사진 자료, 여기저기 정보를 찾는 일. 뭐 대충 그런 일 정도이다. 암만 그래도 활용을 잘 하는 이들의 양만큼은 따라가지 못한다.

그 정도인데도 컴퓨터는 힘겨운 모양이다. 전원을 넣고 부팅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. 그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제일 힘들다. 

가끔씩 내 컴퓨터를 열어보는 아내나 딸아이 모두 구물거리는 컴퓨터 속도에 한숨을 내쉰다. 아니 이렇게 느린 걸 가지고 어떻게 작업했느냐며 타박이다. 

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나도 인정한다.

커피 한 잔을 다 마시도록 부팅이 안 된다.

아니,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! 성미 급한 사람 이러다 숨넘어가겠다! 나는 느린 컴퓨터를 보고 성화를 대거나 졸라댄다. 그때다. 문득 어머니를 졸라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.

어머니는 가끔 별식을 해 주시곤 했다. 별식이라면 맛있는 빵이다. 두툼한 찐빵. 그 시절, 찐빵만큼 먹고 싶고, 기다려지는 별식이 어디 있을까. 그러나 찐빵 역시 기다림 없이 그리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.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고 반죽을 한 뒤 안방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발효를 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. 

“엄마, 언제면 먹을 수 있어요?”그러면 어머니는 팥을 삶는 부엌 불을 내다보며 대답하셨다.

“좀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단다.”어머니는 솥에서 팥이 무르게 익고, 밀반죽이 알맞게 뜨고, 떼어낸 반죽에 팥 앙금 한 숟갈을 넣고 반죽을 오므리고, 또 솥 안에 밥보자기를 깔고, 빵을 쪄낼 시간을 계산하면서 대답하셨을 테다.

그러나 성급한 나는 “엄마, 좀이면 그게 언젠데?” 하고 재차 묻는다. 그러면 어머니는 “우리 막둥이 먹고 싶어 눈물 날라 할 때.” 하시며 나를 다독이셨다.

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팅이 느린 컴퓨터가 어머니를 조금 닮았다. 기계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. 왜인지 이 느린 컴퓨터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진다. 

학교에서 돌아와 밥을 재촉하면 어머니는 먼저 ‘배고프겠구나! 조금만 기다려라’ 하셨다. 밥이야 보시기의 밥을 꺼내면 되지만 그 사이 물도 데우시고, 김도 한 장 구우셔야 했다.

이 오래된 컴퓨터 역시 부팅하려면 제 딴엔 이것저것 다 갖추어야 하려니 구동 시간이 좀 걸리겠다. “아직도 더 기다려야 해?” 나는 예전의 어머니에게 조르듯 커피잔에 입을 대며 또 한 번 재촉해 본다.

“우리 막둥이 울라 했지? 이제 찐빵 다 됐다!” 그러시는 어머니 목소리처럼 드디어 컴퓨터가 부팅 됐다. 한번 부팅 되면 페이지는 술술 잘 넘어간다. 처음이 좀 힘들 뿐이다. 

댓글목록 0

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.

시카고교차로소개 | 미디어 킷 | 광고문의 | 신문보기 | 관리자에게
Copyright (C) KOREAN MEDIA GROUP All right reserved.
HEAD OFFICE: 3520 Milwaukee Ave. Northbrook, IL 60062
TEL. (847)391-4112 | E-MAIL. kyocharo@joinchicago.com
전자신문 구독신청

Terms & Conditions | Privacy
Copyright © 2023 Kyocharo All rights reserved.
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.
PC 버전으로 보기